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난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중국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의 분립시대나 남북조 분열시대에도 중국인들은 '언젠가는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중국의 모습이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중국을 영어로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이유로 진나라의 진(Chin)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이 간다.
-최초의 황제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왕이 된 진시황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드디어 중국천하를 평정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했다. 진시황은 자신의 크나큰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전부터 쓰던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신과 마찬가지라는 뜻을 가진 '황제'에 최초라는 뜻의 '시'자를 덧붙여 자신을 '시황제'라 부르기로 했다. 이후 황제라는 단어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되었다.
-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제도를 새롭게 제정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문자의 통일'이다. 천하를 통일했을 당시,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다. 그 근본은 모두 은나라의 갑골문자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글자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은 폐지시켰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사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진시황은 단순히 국토만 통일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도량형의 통일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당시 중국 전역은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나, 길이를 재는 단위 등이 약간씩 달랐다. 그래서 되나 말이 지역마다 달라서 이곳에서의 1말 이 저곳에서의 1말보다 적은 경우가 많았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바로 그 해에 한 홉이라는 표준용기를 제작해,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편리하게 거래가 오가게 되고, 따라서 산업과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진의 화폐가 전국적으로 통용되었다.
-바퀴 폭의 통일
통일되기 전의 대륙 각국은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제각기 달리했다. 즉 수레는 대부분 전차였는데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냈고 이것은 레일처럼 골을 만들었다. 알다시피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바퀴 폭을 다르게 해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 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진시황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더 이상 적의 침입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퀴자국의 차이가 이제는 전국의 교통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도도를 만들고 바퀴의 폭을 통일시켰다.
-만리장성 건설
통일 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이 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에 여러나라들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들을 증축, 개축하도록 하는 임무를 몽염장군에게 맡겼다. 몽염은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10여 년 만에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는 1만여 리의 대장정을 완성했다. 이 대공사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사람들 머릿속까지 지배하고 싶어 했던 진시황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 이념인 법가사상서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도 소지할 수 없도록 했으며 관리가 아닌 사람들은 자유로운 학술토론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곧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 수거되어 잿더미로 변했다. 옛 서적에 대해 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나라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 이를 비판하는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진나라는 가혹한 강압 정치와 만리장성, 아방궁 같은 대공사로 고통을 당한 백성들이 황제가 죽은 이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멸망하게 된다. 통일한지 겨우 14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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