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상식 / / 2020. 4. 6. 16:03

사도세자 비극의 비밀과 붕당 정치

때는 1762년 윤 5월 삼복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조선의 왕세자가 뒤주 속에 갇혔다. 그리고 여드레 만에 죽었다. 누가 왕의 후계자인 세자를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만들었을까? 범인은 놀랍게도 세자의 아버지인 영조. 그러나 세자를 죽인 진짜 범인은 200년간 제 기능을 다하고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붕당 정치라는 괴물이었다.


-붕당이란?


 붕+당이 붕당이다. '붕'은 벗 붕(朋), 같은 선생님 밑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를 뜻한다. 똑같은 것을 배웠으니 학문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고, 조선시대에 학문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은 곧 정치적인 생각도 유사하다는 것을 뜻한다. 당은 무리 당(黨),이익을 함께하는 집단을 일컫는 것이다. 정리하면 붕당 정치란 정치적 입장과 추구하는 이익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당을 이루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붕당은 언제 생겨나고 어떤 기능을 했을까?


 붕당이 처음 생긴 것은 조선 선조 때의 일이다. 이조에 전랑이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마침 이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조전랑은 높은 벼슬은 아니였지만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리였다. 왕 다음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의정부에서도 이조전랑의 권한은 함부로 넘보질 못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조전랑에게는 한 가지 특권이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만둘 때 자기 다음에 올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추천후보는 김효원이었다. 그러나 심의겸이 김효원은 아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럼에도 간신히 김효원은 전랑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드디어 김효원이 후임자를 추천할 차례가 되었다. 후보로 심충겸이란 사람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거부했다. 심충겸은 과거에 자신을 힘들게 했던 심의겸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관리들과 선비들은 자연스레 두 쪽으로 갈라졌다.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에 살았던 김효원 쪽을 동인, 서쪽인 정릉방에 살았던 심의겸 쪽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그 이후 서인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인은 또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인은 특히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활발하게 정치를 했지만, 광해군이 서인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북인도 함께 몰락하였다.

서인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임금으로 인조를 세웠다.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서인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남인은 2인자가 되었다. 서인이 남인보다 우세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중했고, 토론을 통해 국가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현종 때, 예송 논쟁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관계는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다. 예송 논쟁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에게 상복을 몇 년 입힐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효종이 죽고 난 다음 한 번, 효종의 부인인 효종비가 죽고난 다음 또 한 번이 일어났다. 이것은 단순한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왕위 계승이 정당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두 차례 일어난 예송 논쟁에서 첫 번째에는 서인이, 두 번째에서는 남인의 의견이 채택되면서 드디어 남인이 권력을 쥘 수 있게 되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서인은 또다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 정치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정권을 잡지 못한 반대편 당의 사람들은 목숨을 잃게 되는 등 당파 간의 싸움이 격렬해졌다.


-그렇다면 붕당정치와 사도세자랑 무슨 관련이 있는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은 왕위를 물려줄 아들도 없이 죽고 말았다.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는 뒷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중 무수리 출신으로 지체가 매우 낮았다. 게다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이런 가운데 영조가 임금이 될 수 있도록 밀어 준 이들이 바로 노론 세력이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노론 세력의 우두머리인 홍봉한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였다. 영조와 노론 사이의 동맹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과 손을 잡고 노론을 비판했다.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해 영조에게 나쁜 말들을 고해바쳤고, 영조는 그럴 때마다 사도세자를 호되게 나무랐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사도세자는 영조가 싫어하는 궁궐 밖 나들이를 하기도 하고, 우발적으로 궁녀를 죽이기에 이른다. 이때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사도세자의 잘못 열 가지를 적어 영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영조의 분노를 자극했다. 결국 영조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 했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도록 했다.

 사도세자가 사정을 하고, 나중에 정조가 될 손자가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조는 뒤주의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게 했다. 그리고 8일 만에 사도세자가 죽고 말았다. 붕당의 세력 다툼 끝에 다음 왕위를 이를 세자가 희생당하고 만것이다.

 영조와 정조는 붕당 정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탕평책이란 당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 붕당 정치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붕당 정치의 문제점을 채 해결하기도 전에 정조는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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